♧ 갤러리

피카소..................

해sun 2006. 6. 20. 00:00

 

 

 

 

Pablo Picasso ( 1881~1973년)

 

 


스스로 12살때부터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렸다고 자부한 그림 천재 피카소는 스페인 남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열 네살에 한 달이 걸릴 그림을 단 하루만에 그려내기도 했으며, 열 여섯에서는 모든 콩쿨을 석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열 여덟살에 스페인 대표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이후 피카소가 살던 당시의 스페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 문명에 비해 변두리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들라크루와와 마네로 인해 20세기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구요. 따라서 19살의 피카소가 파리를 동경하고 그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파리는 전체가 거대한 미술학교 였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그는 넋을 잃었습니다. 또한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가 단 하나뿐이던 파리 몽마르트에서의 고통스런 생활을 견디어 낸 건 피카소의 열정이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피카소의 화풍을 일컬어 '청색시대, 분홍시대' 등으로 나누곤 합니다. 그 구분은 대부분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자살과 궁핍한 생활이 그의 화면에 차가운 청색 단색조의 "청색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후 그의 첫 여자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장미시대"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한 여성편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평생 7명의 여자와 살았는 데 두 명은 그를 잊지 못해 자살하고, 두 명은 지나친 질투로 정신이상이 되었으며 한 여자는 요절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여자들이 모두 "그와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두번째 여자 청순 가련한 에바는 친구의 연인이었지만 열렬히 사랑했으나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세번째 연인이었던 발레리나 올가와는 아들도 있었으며 정식 결혼도 하였습니다. 마흔 살에 거부가 된 피카소는 올가의 사치에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17살이었던 네번째 여자 마리 테레즈를 만나고 그녀는 피카소에게 초현실주의 영향을 주었으며 최고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딸을 낳은 22살의 테레즈를 버린 피카소가 만난 도라는 다섯번째 여자였고, 그 후에 만난 21살의 프랑수아즈는 법대를 나온 지적이며 자유분방한 여자였습니다. 일곱번째 연인 자클린은 그보다 40년 연하의 여자로 절대 헌신형이었으며 피카소 말년의 생애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준 여자였습니다.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인 피카소였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정열과 독특한 개성은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카페에서 열기찬 토론이나 즉흥적 퍼포먼스를 즐겼던 그의 광란적 취미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1937년 4월 26일 히틀러가 3시간 동안이나 바스크의 작은 도시를 무차별 융단 폭격하여 주민 7천명 중 1천 이상이 학살당하고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미친 사람처럼 24피이트 너비 11피이트 그의 대표적 작품 <게르니카>를 한 달만에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게르니카>는 파시즘 독재와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이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블랙리스트 첫머리에 기재될 정도로 파시즘에 대항한 간판스타가 되어 수많은 추종자가 생겼습니다. "회화는 공격적인 전쟁의 도구" 라고 말한 그는 1차·2차 대전 등 엄청난 전쟁과 변혁의 시기였던 20세기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 선각자였습니다.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의 별장에서 사망한 피카소는 거의 2만점이나 되는 작품과 20세기 가장 유명한 예술인이라는 명성을 남겼습니다. 또한 " 진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라는 마지막 유언과 함께…

 




최근 피카소의 연인으로 알려진 여인이 피카소 작품을 팔아 거액을 챙겨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파블로 피카소가 크레용으로 ‘끄적인’ 작품이 1억3천만원에 매물로 나왔다.

뉴욕의 한 대형 할인 매장에서 판매중인 이 작품은 지난 1958년 5월 피카소가 크레용으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


‘Atelier De Cannes’라는 작품의 판매가는 12,999.99달러(약 1억 3천만 원). 제작일자와 피카소의 친필 사인이 선명히 새겨진 화제의 크레용 그림은 전문가들로부터 진본이라는 검증을 받았다고.

한편 지난 1월 할인 매장의 웹사이트를 통해 피카소의 또 다른 그림이 4천 만 원에 팔리기도 했다.

최근 피카소의 작품들이 자주 언론에 등장하고 거래되는 것은 그만큼 피카소가 다작을 했기 때문. 피카소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 하루에 그림을 10~20장씩 그렸고, 한 식당에서는 연회를 열어 준 후 그림을 대신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사진 설명 : 왼쪽은 1억 3천만 원, 오른쪽은 4천만 원 짜리 피카소 그림)

팝뉴스 이남주 기자

 

 

 입체주의 화가 피카소 그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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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기타리스트

1903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미술관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은 우수어린 청색이 지배하고 있어
흔히 청색시대라 불린다.

이 작품은 당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의 참상을 나타낸 매우 스페인 적인 그림이다.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 캔버스에 유채 뉴욕 근대미술관


  이 작품의 정확한 이름은

<바르셀로나의 아비니호거리의 여인들>이다.


이 작품에서는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 보다도
어떤 수법으로 화면이 구성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
고전적인 원근법을 멀리하고

인물과 공간이 같은 차원으로 취급되고 있다.




드뤼아스

1908 캔버스에 유채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지미술관

    <숲속의 나부>로도 불리는 작품이다. 드뤼아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의 이름이다.




부채를 든 여인

1909 캔버스에 유채 모스크바 푸시킨박물관


  이 그림에서는 광대의 모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는 것을 보여 주는 듯 하다.




토토사의 벽돌공장

1909 캔버스에 유채 레닌그라드 허미티지
 
  이 작품은 엄격한 건축학적 해석과

원근법까지 갖춘 특성을 갖고 있다.




칸바일러의 초상

1910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미술관


  분석적 입체주의 수법으로 그려진 이 걸작 초상화의 모델은
피카소와 가까이 지내왔던 미술품 상인이다





기타리스트

1909~1910 캔버스에 유채 파리 근대미술관


  이 작품은 피카소의 입체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다.




파이프를 든 사나이

1915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미술관

  이 작품은 피카소가 입체주의 화가들이

잘 이용했던
콜라주 수법을 유화로 역이용하여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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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악사

1921 캔버스에 유채 뉴욕 근대미술관


   <파이프를 든 사나이>와 비교될 수 있으면서
훨씬 장식적이고 평면적으로 나타낸 작품아다.




게르니카

1937 캔버스에 유채 뉴욕 근대미술관


   1930년대에 그려진 피카소의 통렬한 파시스트 고발 및 반전 작품이다.
독일 나치스가 프랑코장군을 지원하기 위해 게르니카라는
작은 도시를 폭격한 만행을 그린 것이다.





오바드

1942 캔버스에 유채 파리 근대미술관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어둡고 음산한 색조를 띄게 했다


♬ Amour Defendu.......Mireille Mathieu
(금지된 장난)